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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배구는 1895년 미국 메사추세츠(massachusetts)주 홀리욕시에 있는 Y. M. C. A의 체육부장 Williams G.Morgan에 의하여 고안되었다.
당시 모어간은 과격한 농구보다 좀 유연한 Ball Game의 필요성을 느껴, 흥미 있고 남녀노소가 적당한 운동으로서 함께 즐 길 수 있는 대중적 운동을 모색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배구의 초기 명칭은 미노넷(Minonette) 으로 불렸으나 처음에는 테니스에서 힌트를 얻고 테니스 네트를 체육관 중앙에 6피이트 6인치의 높이에 설치하여 시험하였다. 이에 미국
메사추세츠의 spring fie ld의 할스테드(DR.H alstead)씨가 Ball을 네트를 넘겨 날려보내는 게임을 창안해낸 후부터 "발리 보올" (Volley Ball) 이라는 명칭을 붙이게 되었다.
처음 직장인을 위한 레크리에이션 활동으로서 고안되었으나 점차 널리 행해졌었다.이렇게 실시된 배구는 1900년에 캐나다에, 1905년에 쿠바가, 1922년에 Y. M. C. A 선수권대회가
공인대회로 맨 처음 개최되어 성황을 이루었고, 1946년 프랑스 파리를 주축으로 소련, 폴란드, 유고슬라비아, 체코 등 14개국이 참가한 국제배구연맹(International Volley Ball
Federation)이 창설되었다.
이의 발전으로 말미암아 배구 규칙이 통합 제정되고 국제 경기가 개최 됨으로써 배구 경기의 열기를 자극시키게 되었다. 배구가 올림픽 종목으로서 채택된 것은 1961년 남자 배구가
아테네에서 열린 I . O. C 총회의 결정에 의하여 채택되었으며, 여자배구는 그 다음해 1962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I. O. C 총회에서 채택, 1964년 日本 도요쿄오 올림픽대회부터 정식
종목으로 인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10년대

1910년대

20세기 초 이땅에 들어 온 근대경기들은 당시 사대사상에 젖은 양반들의 천시풍조속에 정상적인 보급발전을 이룰수가 없었다. 단지 열의에 찬 서양선교사와 몇몇 선각자들에 의해
산발적으로 운영되다가 그나마 일제침략에 의한 압박과 제약으로 제대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러한 때에 배구가 이땅에 도입되었으니 체계적인 조직이라던가 대회라는 것은 두말
할 나위도 없는 일이겠다. 특히 우리보다 일찍 서구문물을 받아들인 일본은 체육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한수 우위를 점하면서 운동경기를 식민을 위한 문화정책의 한 수단으로
이용하니 '우리 민족의 자주적인 체육'이란 불가능한 것이었다.
당시의 영향은 현재까지 계속되어 아직도 경기명이나 용어에 일본의 잔재가 남아있는데 하물며 일제시대의 체육활동이란건 일본인 중심이거나 간혹 뛰어난 재질을 갖춘 우리 선수가
있었다해도 제대로 성장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와중에서도 3.1운동을 기점으로 민족자존을 부르짖는 소리가 높아가고 당시민족의 대변지 동아일보나 조선일보 등 에서 '민족의
강건'을 부르짖으면서 건강한 체력만이 아니라 나라를 살릴 수 있는 길임을 강조할 우리 체육활동도 비로소 조직화 되기에 이르렀고 현 대한 체육회의 전신이랄 수 있는 조선 체육회의
발족을 보게 되었다. 결국 일제시대의 체육은 곧 애국운동으로 대변되는 바 일제의 억압과 장비하나 제대로 구할 수 없는 열악한 환경속 에서도 오로지 일본을 이겨보겠다는 의지
하나로 피땀흘리며 연습에 몰두한 당시 체육인들의 높은 기상은 오늘날의 혼탁해진 스포츠 정신과 비교해 볼때 많은 각성을 불러 일으킨다 하겠다.
특히 초창기 배구는 육상이나, 축구, 농구, 야구와 비교해 볼때 20여년이나 뒤늦게 도입되어 일반인들의 인식부족과 선수의 결여, 이렇다 할 지도자 하나 없는 상황에서 선수 한 사람이
1인 3역, 4역을 감당해야 했던 형극의 길을 헤쳐왔다. 그러던 것이 오늘에 있어서는 세계를 점하는 눈부신 발전을 이룩했으니 배구 70년사를 더듬어 보는 일이야말로 배구인들의
긍지와 자부심을 불러 일으키는 것은 물론 한국 배구의 미래를 점쳐볼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리라 믿는다.

1910년대 : 배구의 탄생과 국내상륙

최초의 배구경기 - 배구가 창안된 것은 1895년 미국[메사츄세츠]주 홀리요크 시 Y.M.C.A를 중심으로 보급되는 가운데 정식경기로 규칙이 개정 보완되면서 그 기틀이 잡혀졌고 점차
국외로도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1910년 최초로 16인제 배구가 필리핀에 보급되었고 그후 1913년 일본에 전해졌는데 그리하여 그해 개최된 제1회 극동올림픽에서는 16인제배구가
정식종목으로 채택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1916년 3월 25일 우리나라에 처음 전해진 배구는 12인제였고 수년 후 다시 9인제로 바뀌었는데 이는 모두 Y.M.C.A를 통하여 이루어
졌으니 배구와 Y.M.C.A와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하겠다.
우리나라에 처음 배구를 보급한 이에 대해서는 두가지 견해가 있는데 하나는 Y.M.C.A의 운동부와 유년부 고문으로 내한한 반하트씨가 청년회원들 에게 배구경기를 소개, 지도함
으로써 이루어졌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당시 제일고보 체육교사인 스기하라(당시 배 구협회이사로 단순한 체육교사가 아닌 고등관임)가 학생들에게 가르쳤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을 살펴보면 두가지 견해 모두 타당함을 가지고 있는데 초창기 배구는 일정한 규칙이나 경기내용없이 양편으로 나뉘어 공을 주고 받는 정도였다는 걸로 미루어 배구가
반하트씨에 의해 도입은 되었으나 그것은 다분히 선교를 위한 '레크레이션'적인 성격이 강한 것이었을 가능성이 많다.

20~30년대

1920~30년대 : 강습회를 통한 배구의 빠른 보급

배구가 도입된 이래 가장 중요한 과제는 이의 보급에 있었던 만큼 1925년 이후부터 강습회나 운동장려를 위한 운동부 신설이 속속 이루어졌고 본격적인 각종 배구경기가 열리기
시작하였고, 1925년 4월 신학기부터는 태화여자관에서 운동부를 신설하고 부원을 모집하여 매주 목요일과 일요일에 농구와 배구를 일반여학교 학생과 교원들에게 당시 Y.M.C.A
체육교사가 담당지도하였다. 이는 일반여자 운동계의 배구보급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1926년 8월 25일부터 4일간 겊여서는 조선신무사 주최로 일본배구계의 권위인「나라」「고조」중학교의 「미끼류우료」씨를 초청하여 배구경기에 대한 강습회가 열렸다.
이어 1927년 3월16일부터 4일간 일본인의 경성기독청년횡년회에서도 배구, 농구의 권위자인 일본 Y.M.C.A체육부간사이며 극동 「올림픽」대회 위원인 브라운씨를 초청하여
농•배구 강습회를 개최하여 이제 걸음마를 시작한 우리 배구계에 지대한 공헌을 하면서 기술향상과 보급발전에 큰 공헌을 하였다.
일시적인 배구시합을 넘어 최초의 공식적인 배구대회가 1925년 10월4일에 개최되었는데 일본인이 경영하는 전조선 신문사 주최의 제1회 전조선 배구 농구대회가 바로 그것이다.
또한 중앙기독교청년회 주최로 1928년 열린 전조선중등학교 배구선수권대회는 일본인 손에 의하여 열린 다른 대회와 달리 최초로 우리 손에 의하여 이루어진 행사였다. 1930년대
접어들면서 한국배구는 경기의 내용면에서도 상당한 진전이 있었고 공식적인 여러 대회들이 열림으로써 본격적인 배구 경기가 치뤄지게 되었다. 뿐만아니라 이 시기에 활약했던
선수들은 모두 해방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배구사에 길이 빛날 선각자들로서 배구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그 선수들 중에 철도국의 박계조와 안종호는 우리 배구사에 있어 신화적인 인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박계조의 배구에 대한 열정을 지금까지도 개최되어지는 박계조배로
이어오고 있으며, 같은 시대의 안종호는 우리 나라의 처음인 한국인 심판이로서, 배구인들에게 많은 모범을 보여왔다.
이들을 바탕으로 점점 더해지는 배구열기에 힘입어 각종 대회에 배구팀이 참가하게 되었는 바, 내용을 보면 오늘날의 전국체육대회와 같은것이나 다만 일본인 체육단체인
조선체육협회에서 주회한 일본인 위주의 체육생상인 조선신궁경기대회가 1925년 처음 열리었고 이대회와 마찬가지로 일본인에 의한 또 다른 종합경기로 명치신궁경기대회가
1924년부터 개최되었다. 또한 체육을 애국의 길로 강조되던 이 당시에 여자 체육진흥을 위해 육상만으로 시작했던 조선여자 올림픽대회에 배구를 신설하여 1924년 제1회 대회를
시작하였고, 여성체육진흥과 더불어 지방체육행사도 활성화를 위해 1929년부터는 관서종합경기대회 등도 개최하여 배구는 나날이 장족의 발전을 거듭하게 되었다.

40~50년대

1940~50년대 : 성장기 배구

8.15 조국광복은 우리나라 전반에 걸쳐 큰 활력과 희망을 불러 일으켰는데 이 여파는 체육계에게도 마찬가지여서 우리의 재경체육인들은 중앙 기독교청년회를 중심으로 현 대한
체육회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조선체육회를 발족하면서 조선체육의 재건에 혼신의 힘을 쏟기에 이르렀다.
뿐만아니라 국내 각종 경기단체들도 나름대로 조직을 완료하거나 결성을 준비하였는데 대략 내용을 살펴보면 조선체육회를 위시하여 조선 빙상경기협회, 조선육상경기연맹,
조선체조연맹, 조선송구면맹, 조선 아마츄어권투연맹, 조선배구협회등 30여 개에 달했다. 특히나 육상, 농구, 축구, 권투와 같은 종목들이 일제하에서도 비교적 자율적인 활동이
가능했던 반면 별반 인기도 없었고 대부분 일본인의 독점과 횡포에 시달려온 배구는 그 어떤 온동보다도 감격의 해방을 맞이함과 동시에 우리 손으로 이끌고 나갈 협회 결성에 남다른
열정과 성의를 다하였다.
그리하여 해방전에는 몇개에 불과했던 배구팀들이 해방과 함께 일약 인기종목으로 급변하면서 거의 모든 학교에 배구부가 신설되게 된다. 이때 생겨난 배구부팀들을 대략 살펴보면
여자고등부의 경우 경기, 이화, 숙명, 진명, 덕성, 풍문, 중앙, 배화, 숭의, 창덕, 상명, 동덕, 한양, 한성, 무학, 서울여상등이고 남고부는 경기, 경동, 선린, 용산, 중경, 인창, 대신, 철도,
배제, 명지, 한성, 덕수, 숭문, 남산공전등이 있었으나, 1960년 배구가 9인제에서 6인제로 바뀌면서 하나 둘씩 해체되었으며, 현재까지 명맥을 유지하는 학교는 중앙여고와 인창고만이
있을 뿐이다.
해방후 불어닥친 배구의 열풍은 실업팀에도 변화를 가져오는데 일본인들이 물러감에 따라 일본인 위주의 체신팀은 자연 해체되고 철도팀만은 김종억, 김명수등이 남은 선수와 각 사업
소대표들을 규합하여 팀을 새롭게 재건한다.
그러나 배구협회를 창설하고 각종 공식경기들이 속속 생겨나면서 배구의 보급과 기술이 향상되어갈 즈음 발발한 6.25전쟁은 배구는 물론 모든 분야의 발돋움에 찬물을 끼얹고 말았다,
불행중 다행이라 한다면 전쟁으로 맥이 끊길 뻔 했던 배구역사가 그나마 군에 입대하 배구인들의 노력으로 군팀을 중심으로 부단히 그 활동을 유지해간 결과 많은 성과를 이루어 냈고
막강한 군배구팀의 전력은 종전후에도 계속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 후 우리 배구는 새로운 도약을 위한 준비에 몸부림치게 되는데 해외로 눈을 돌려 국제경기에 참가함은 물론
그를 계기로 극동식인 9인제를 벗어나 국제식배구 6인제 도입을 준비한 때이기도 하다.
또한 경제적 여건이 좋지 못한 우리나라 상황에서는 배구가 실내경기로 창안되었음에도 시설의 미비로 자연스레 실외경기화되었으나 60년대를 넘어가고 70년대 이르러 체육관
건립이 속속 진행되고 체육이 국가적 차원의 지원을 받기에 이르자 배구 역시 실내경기로 자리잡아가게 되었다. 바로 이러한 변화의 전초전으로 해방 후 10여년간의 격동기는
배구사에 무한한 고난과 땀을 요구하였다.

60년대

1960년대

해방 후 20년이란 세월이 흘렀고 전쟁의 혼란을 겪은 10여년을 제한다 해도 우리 체육계가 어느덧 성년을 맞이하게 된 이 시점에서 한번쯤은 자기 검토를 해 보아야 할 일이다.
경제적 어려움과 민족사의 비극 속에서도 일본을 제외한 아시아의 체육강국이라 자타할만한 우리 체육계였지만, 성년이라는 이름을 내 걸기에는 미흡한 점이 많이 있었다.
우선 32개 산하단체를 옹호하고 있는 대한 체육회가 모두 비체육인들에 의해 운영되는 바람에 순수성을 잃고 정치에 기생하여 그 여파에 주체적이고 일관적인 체육진흥을 가져오지
못한 점이다. 그 뿐인가, 비대해진 체육회를 이끌어 갈 행정부 하나 없이 무기력한 문교부의 무관심한 태도속에 방치되다 보니 모든 책임이 경제력도 실질적 권한도 없는 대한체육회로
돌아가 국내 각 체육의 발전이라던가 해외진출의 기회에도 든든한 뒷받침을 하지 못하였다. 이는 곧 모든 체육계 전반에 걸친 제반시설의 낙후와 인재발굴의 난점을 몰고 왔고 결국
무한정 성장할 수 있었을 우리 체육계의 잠재력을 사장시키고 말았다.
그러나 1964년 올림픽 참가를 계기로 체육진흥이 국가적 과제이자 국민적 관심이 대상이 되면서 1965년에는 효력을 발휘 하지 못하던 국민체육진흥법 개정안이 국회에 제출되어
체육계에 일대 서광을 비추기 시작하였고 그 결과 시작만 했을 뿐 끝을 보지 못하던 체육회관 준공이 국가적 보조에 힘입어 1965년 말에 그 완공을 보기에 이르렀다.
또한 5회 아시아대회와 제 19회 멕시코올림픽 및 1970년도의 아시아대회에 이르기까지 6개년 [장기선수 강화훈련계획]을 작성,지도자의 자직향상,신인발굴,스포트의 과학화,
시설확충 및 기구정비,경기수준의 향상 등을 목적으로 체육계 전반에 걸친 대대적인 진흥정책을 펼치기에 이르렀다.
진통속에 초등학교부터 실업에 이르기까지 배구인구의 급속한 확산은 물론 기술과 체력 그리고 신장의 두드러진 성장을 보인 때이기도 하다.
배구의 붐은 남녀 실업팀을 비롯 중•고교팀들이 우후죽순 탄생, 초등학교배구가 창설되고 아시아 청소년 배구대회가 우리 손으로 창설되는 등 학교 배구가 유례없는 호황을 누린
시기이며 6인제 도입 초기와는 달리 날이 갈수록 서울과 지방간의 실력차가 줄면서 평준화의 시대를 예고한 때이기도 하다. 이 시기는 국내 각종 경기만이 아니라 국제 경기에도 부단히
참여함은 물론 친선경기차 해외로 원정을 나가거나 외국팀을 초청하기도 했다.
국제경기 참여를 보면 배구가 최초로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어 벌어진 1964년 동경올림픽에 남녀팀 모두 참가했으며 아시아 경기대회의 경우 1962년 제4회 자카르타대회에
한국은 처음으로 여자팀을 보냈음은 물론 6인제에도 참여하여 상당한 전적을 올리기도 하였다. 국내의 상황을 살펴보면 1962년 故 박계조를 추모하는 '박계조배 배구대회"가
창성되었고 1963년엔 대한배구협회 산하 단체로 '한국실업 배구연맹' 창립되어 한국 실업 배구연맹전이 시작됨은 물론 1963년 각종 대회가 잇달아 신설됨으로써 전국에 걸친 배구의
보급과 배구인구의 저변확대에 일조를 가하게 되었다.
또 청소년배구를 육성, 권장하는 의미로 1962년 한일고교 교환경기에 대한 사업이 대한배구협회와 일본배구협회간에 착실히 진행되었으고, 3회 대회로 막을 내리긴 하였으나 각국
청소년 배구의 실력을 저울질하는 동시에 장차의 기술향상과 발전에 도움을 주자는 의미에서 우리의 제의로 개최된 '아시아 청소년 배구대회'도 있다.
6•9인제가 병행되었던 이 시기 우리 배구를 일괄해 보자면 국내적으로는 6인제에 빠르게 적응하면서 중•고배구의 붐과 국가적차원의 초등학교 배구 육성책이 실시되는 등 주목할만한
변모가 있었으며, 국제적으로는 활발한 해외진출을 모색하면서 처음으로 국제대회에서 북한과 집전하여 배구가 범국민적 관심의 대상이 되었고 여러 국제대회를 통하여 우리 배구의
세계 무대 진출에 밝은 전망을 제시해 준 때이기도 하다.

70년대

1970년대

전쟁과 혼란의 아픔을 딛고 우리도 한번 잘살아보자는 기치아래 경제,사회 모든 면에서 땀흘려 일하며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했던 시기.우리 스포츠도 국내의 좁은 운동장을 벗어나
세계로 세계로 나가기 시작했다. 물론 충분치는 않았지만 체육진흥을 위한 국가적 관심과 장려도 뒷받침되었고 열악한 환경과 여건 속에서도 우리 스포츠는 점점 세계의 두터운 벽을
허물기 시작하면서 민간 외교사절로 큰 몫을 담당하며 '한국(Korea)' 이란 이름을 세상에 심기 시작하였다.
특히 배구는 세계정 상을 차지할 수 있는 유일한 종목으로 각광받으면서 배구강국으로 도약, 배구 70년 사상 가장 화려하게 꽃을 피운 황금기이기도 하다. 여자배구가 구기 종목사상
최초로 올림픽 동메달을 차지하고, 남자는 서구의 장신 벽을 허물고 세계 4위로 올라서는 쾌거를 맛보는 등 온 국민의 환호와 기대속에 전국을 배구열기로 들끓게 만들었다. 아직까지도
배구팬들의 기억속에 생생하게 살아있는 전설같은 스타플레이어들이 탄생한 것도 이때이다.
국내적으로도 국민학교 배구부터 시작하여 어머니배구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배구의 저변확대가 이루어졌고 속속 착공되는 체육관의 건립으로 완전한 실내경기로 자리잡게 되었다.
또한 학교체육으로는 물론 직장체육으로의 붐을 일으키며 이제까지 축구, 농구에 밀려왔던 관심을 배구에 머물게 만들었다. 특히 배구는 세계 정상을 차지할 수 있는 유일한 종목으로
각광받으면서 배구강국으로 도약, 배구 70년 사상 가장 화려하게 꽃을 치운 황금기이기도 하다. 여자 배구가 구기 종목사상 최초로 올림픽 동메달을 차지 하고 남자는 서구의 장신벽을
허물고 세계 4위로 올라서는 쾌거를 맛보는 등 온 국민의 환호와 기대속에 전 국을 배구열기로 들끊게 만들었다. 아직까지도 배구팬들의 기억속에 생생하게 살아있는 전설같은 스타
플레이어들이 탄생한 것도 이때이다.
이를 바탕 으로 한국 배구는 기업들의 스포츠 참가가 두드러졌으며, 많은 실업팀의 창단과 대기업등의 스포츠 참여에 기여하였고, 또 하나의 특기할 사항이라면 스포츠 인력의
해외진출하는 등 해외에 우리나라를 알리는 중요한 시기였다.

80년대

1980년대

80년대에 접어들어 한국 스포츠계는 변혁의 바람이 불어왔다. 86아시안 게임과 88서울올림픽을 유치함에 따라 온 나라안이 스포츠 열풍으로 소용돌이쳤다. 정치,사회적으로 직시된
당시, 국민들의 답답증을 풀어주는 유일한 분출구는 마치 스포츠인 것처럼 보였다.
86아시안 게임과 88서울 올림픽 유치를 기점으로 급속히 변화된 국내의 스포츠 환경에 배구계 또한 민감한 영향을 받고 있었다. 1979년 이낙선 회장이 퇴진한 이후 박경원, 이상용
씨가 잠깐씩 회장직을 이어받다가 80년 10월 효성그룹 조석래 회장을 필두로 경제인이 한국배구를 이끌기 시작한데 이어 83년 8월 한일그룹의 김중원 회장이 제 24대 배구협회장으로
취임해 89년 2월 퇴임하기까지 80년대 한국배구를 주도했다. 특히 84년, 80년대 초반의 스포츠 열기와 스포츠 외부적 영향이 반영된 [백구의대제전]대통령배 배구대회가 출범되면서
이전까지와 다른 새로운 차원의 한국배구를 견인하는 전기를 마련했다.
이때에는 김중원 회장의 취임과 더불어 배구인들의 사기진작과 경기력 향상을 위해 신설팀의 지원을 강화하고 협회 통솔의 효율성과 단합을 위해 산하 4개 단체로 나위어있던 실업,
대학, 중•고, 초등학교 연맹을 통•패합함으로서 새로운 면모를 갖추게 되며 점차 동절기에 적합한 실내 스포츠로 정착해가는 배구의 발전과 붐 조성을 목적으로 농구와 마찬가지로
겨울의 추위를 잊게 할 '대통령배 배구대회'가 84년 창설됨으로서 그동안 계속되온 실업연맹전이 없어지고 성인배구도 반은 프로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대통령배 배구대회'가 출범되면서 신인 선수들은 대거 등장하고 실업배구의 판도는 많은 변화가 주어졌다. 70년대를 주름잡던 미도파는 현대와 선경의 출현으로 184연승을
마지막으로 연승가도를 끝내고 이것이 청량제가 되어 불꽃튀는 경쟁을 펼쳐냄으로서 사상 유례없는 관중동원까지 부르게 되었다. 이는 여자배구가 춘추전국시 대로 들어섰다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남자 배구 또한 83년 현대자동차 써비스와 고려증권이 팀을 창단하면서 6개팀으로 증가, 활성화를 띠기 시작했고, 대학배구도 경기대와 인하대를 위주로 우수 고교 선수들을 진학시켜
탄탄한 실력과 함께 실업 배구를 능가하는 전력을 가지게 되었다. 예를 들면 이때의 대학 선수들로는 경기대의 장윤창과 정의탁, 이종경, 인하대의 문용관, 유중탁, 한장석 등이 있다.
이러한 우수한 선수들의 힘입어 81년 제2회 세계 청소년 배구 선수권 대회에서 중국과 브라질, 페루를 연달아 격파하며 2연패라는 구기사상 최고의 위업을 달성하였다.

90년대

1990년대

90년대 들어 국내 배구는 새로운 양상을 보이게 된다. 지금까지 여자의 경우 대농과 현대의 양대산맥이었던 체제가 무너지면서 호남정유를 시작으로 한일합섬, 흥국생명 등
신흥세력들이 부상하게 되고 남자팀의 경우도 '공포의 외인구단'이라 불릴만한 상무와 대학세인 한양대, 성균관대 등이 코트의 새로운 주인으로 등장하면서 국내배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열기를 띠게 되었다. 특히 별반 스타가 없는 여자배구보다는 화려한 플레이에 준수한 용모까지 갖춘 남자선수들의 대량 배출은 대통령배는 물론 각종 대회가 있을 때마다
그들을 보기 위해 경기장에 운집하는 팬들로 인해 복도까지 부족할 지경에 이를 정도로 호황을 누리며 대회를 운영하게 되었다.
그러한 세력판도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은 그동안 파워와 조직력을 위주로 했던 플레이가 세계적 기류에 맞춘 힘과 높이의 배구로 전환됨으로써 이에 편승한 신생팀들은 승승장구하는
반면 과거에만 머물러 있던 기존의 강호들은 개인기량이나 팀관록이 뛰어남에도 힘과 높이의 열세에 무릎을 꿇게 되었다. 세미프로 출범 외에도 전 세계적으로 급속히 확산,인기를
끄는 추세에 따라 창설된 것이 바로 [한국비치발리볼연맹]이다. 90년 7월 창립기념식에서 초대회장 인 김현우(제우교역대표이사)씨는 '비치발리볼은 배구의 기본을 익힐 수 있는 좋은
운동으로 미국, 이탈리아 등 선진국의 예를 봐서 한국에서도 꼭 붐을 이룰 것이다'라며 의욕에 찬 첫발을 내딛었다. 미국이 세계배구의 정상에 오를 수 있었던 것도 해변에 줄지어
늘어선 배구코트와 프로화된 비치발리볼이 근간이 되었음을 지적하면서 창립 첫 사업으로 7월 31일부터 부산 광안리 해변에서의 첫대회를 표명하였다.
제 1회를 시작으로 매년 행해지고 있는 비치발리볼대회는 겨울스포츠라고 여겨왔던 배구의 이미지와는 또 달리 젊음과 낭만을 상징하는 '환상의 여름스포츠'로 새로운 묘미를
보여주는데 국내에선 남자 2인제, 여자 3인제를 실시하며 규격 및 룰은 6인제 실내배구와 거의 동일하다. 다만 어택라인 및 서비스 에어리어가 따로 없고 극심한 체력소모를 감안해
세트당 12점 또는 10점제로 실시하는데 강렬한 태양아래 검게 탄 근육을 드러낸 남자, 또 늘씬한 비키니 차림의 여자 선수들이 짝을 이뤄튀기는 볼의 매력은 큰 눈요기거리도 되지만
선수와 관중과의 거리가 없다는 점에서도 단시일에 인기스포츠 종목으로 부상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다만 문제라면 천혜의 조건을 갖춘 미국이나 남미의 해변과 달리 대회장소가
한정돼 있다는 점이다.
국제대회에서는 17세이하로 구성된 여자쥬니어배구팀이 세계12강이 겨루는 세계유스배구선수권대회에서 정상에 오르고 91년에는 남자가 악전고투 끝에 92 바르셀로나 올림픽
출전권을 따냈다. 89년 FIVB총회에서 세계배구붐을 확신시킨다는 취지 아래 거액의 상금을 내걸고 창설된 월드리그는 90년 4월에 시작돼 이탈리아가 초대 챔피언이 되었으며
우리나라는 91년 월드리그부터 참가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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